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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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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 vs 에피쿠로스학파

심화 · 학부 수업

헬레니즘 철학은 오랫동안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쇠퇴기'로 취급되었다. 20세기 후반 롱·세들리(Long & Sedley, 1987)의 자료집 이후 이 평가는 뒤집혔다. 이 차시의 핵심은 두 학파가 물리학–논리학–윤리학을 하나의 체계로 짜 놓았다는 점이다. 윤리적 조언만 떼어 내 읽으면 자기계발서가 되고, 그것이 오늘날 가장 흔한 오독이다.

논증 재구성

전제에 번호를 붙여 세우고, 실제로 공격받는 전제를 지목합니다. 수업에서 물고 늘어질 지점입니다.

스토아

덕만이 좋은 것이라는 논변

  1. P1. 좋은 것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언제나 이로운 것이다.
  2. P2. 건강·재산·명예는 잘못 쓰이면 해가 된다(참주의 권력을 보라).
  3. P3. 덕은 잘못 쓰일 수 없다.
  4. C. 덕만이 좋은 것이고, 나머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adiaphora).
공격받는 전제

P1이 지나치게 강하다. '언제나 이로움'을 좋음의 조건으로 두면 상식적인 좋음이 모두 탈락한다. 스토아는 이 대가를 알고도 '선호되는 무관심한 것(proēgmena)'이라는 범주로 실천적 공백을 메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 7.101–105

에피쿠로스

죽음이 나쁘지 않다는 논변

  1. P1. 나쁨은 겪는 자에게 성립한다(감각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2. P2. 죽음은 감각의 소멸이다.
  3. P3. 죽음이 있을 때 그것을 겪을 주체는 없다.
  4. C.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공격받는 전제

P1의 '겪는 자 요건'. 박탈설(deprivation account)은 죽음이 좋은 것을 잃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쁠 수 있다고 본다. 네이글(T. Nagel, “Death”, 1970)이 현대의 표준 반론이다.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 · 124–127

스토아

원통 비유 — 결정론과 책임의 양립

  1. P1. 원통을 밀면 구르지만, 구르는 방식은 원통 자신의 모양에서 나온다.
  2. P2. 인상(印象)이 다가오는 것은 우리 밖의 일이다.
  3. P3. 그 인상에 동의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향에서 나온다.
  4. C. 앞선 원인이 모든 것을 결정해도 행위는 우리 것이며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공격받는 전제

P3의 '우리 성향' 자체가 앞선 원인의 산물이라면 양립은 확보되는가. 이것이 오늘날 양립가능론 논쟁의 원형이다.

고대 철학이 현대 자유의지 논쟁과 직접 이어지는 가장 선명한 지점. 사르트르 편과 묶어 읽히면 좋다.

키케로, 운명에 관하여(De fato) · 42–43